감리교 인물 DB 김광우(金光祐, 1906∼1990. 7. 17)


연회장

경기도 부천군 덕적면 북리 능동, 즉 덕적도에서 아버지 김성모(金聖模)와 어머니 정보물(寶物)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그의 아버지는 안동김씨의 후손으로 증조부 때부터 대원군의 안동김씨 박해를 받아 덕적도로 옮겨오게 되었다. 열네 살까지 서당에서 통감(通鑑) 등 한학과 신학문을 약간 배웠다. 당시 덕적도에는 부천군 내 최초의 사립인 명덕(明德)학교와 그가 태어난 곳에서 가까운 명신(明信)학교가 있었는데 명신학교에서 2년 공부하고 명덕학교 3학년으로 전학했다. 명신에는 한학과 신학문을 두루 공부한 이동웅 목사가 선생님으로 있었는데 덕적도에 감리교의 씨앗을 뿌린 분이다. 그 해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명덕학교와 명신학교가 문을 닫아 다시 서당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때 항일운동을 하다 거주 제한을 당한 여운일(여운형의 족제)이 덕적으로 와서 기거하게 되자 아버지가 그에게 부탁하여 일본어와 산수를 배웠다. 여운일 선생이 경찰에 의해 섬을 떠나 무료히 세월을 보내다가 또다시 독립만세운동 관련으로 거주 제한을 당한 김사민 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에게 애국애족의 정신을 배우며 큰 감화를 받았고, 그의 인도로 서울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서울 가회동 김사민의 형인 김사국의 집에 하숙하면서 중동중학교를 1925년 19세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귀향하여 명덕학교 교사를 2년간 하다가 1927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로 유학을 떠났으나 뜻하지 않은 병을 얻어 중도에 포기하고 다시 명덕학교에 복귀하였다.

학교의 여교사 박정수의 중매로 결혼을 하고, 또 그의 권유로 이용도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였다가 사상적 충격을 경험한 후 사회주의의 영향을 떠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25세 때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폐가 약하여 1년을 쉬면서 향리로 내려와 피터스(V.W. Peters) 선교사의 도움으로 소야도에 조그만 개척 교회를 세우고 청소년들을 지도하였다. 신학생 시절 정경옥 교수의 지도로 송정률·마경일·윤종선·주신자 등과 독서구락부 활동을 하였고, 1937년 3월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강원도 철원군 월정리교회로 파송을 받아 농촌목회를 하게 되었다. 농촌목회 4년 후 1940년 봄에 서울 원동교회로 파송을 받아서 잠깐 목회하며 미국 유학을 계획했으나 미일관계의 악화로 미국 여권을 받지 못해 미국 유학의 길은 막히고 원동교회 목회를 계속하였다. 정춘수 감독은 ‘혁신 5조항’을 발표하고 한국 교회를 일본 교회에 병합시키고자 하였는데, 류형기·송흥국·정일형·변홍규·송정률·홍현설 목사 등은 혁신안에 대해 반대하였다. 정춘수 통리자의 임기가 만료되어 1942년 10월 총회에서 변홍규 목사가 혁신파의 사전 모의로 통리자로 선출되었다. 변홍규 통리자가 교단을 독단으로 운영하고 있을 때 교파합동문제가 대두되었다. 김광우는 이규갑·전진규·조신일·송정률 목사 등과 함께 교파합동을 반대하였다. 1943년 총회 때 평신도인 차형근·방수원·문창모·장세환의 단상 점거 등 맹렬한 투쟁과 송정률 등이 총독부에 들어가 혁신교단의 불법성을 이해시킨 후 결국 조선감리교단으로 환원하게 되었다. 임시총회가 반혁신파의 주도로 이루어져 김광우는, 통리자에 전진규, 총무에 송정률 등을 세우는 데 참여하여 냉천동 사무실에 감리교단을 복구시켰다. 그러나 일본 경무국의 불허로 취임 10일 만에 퇴진하고 다시 친일파인 정춘수가 통리자로 재선되었다. 교회통합이란 미명하에 교회를 강제로 통합시키고 예배당을 강제처분해서 국방헌금이란 이름으로 비행기헌납기금을 바치는 일이 있었다. 매각 대상교회는 반혁신파의 교회들이었고, 김광우도 원동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혁신교단 반대파들은 교회도 빼앗기고 목사직 파면 또는 대명이란 이름으로 추방되었다. 김광우는 추방된 후부터 8·15해방이 되기까지 자월도에서 새우잡이 어업을 하였다. 또한 1947년 청파교회로 가기까지 자월교회에서 자원목회하였다.

해방 후 교회재건을 한다며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연원을 둔 친일 지도자들이 반민족적, 반신앙적 작태를 회개, 반성하지 아니하고 조선기독교회로 이름을 바꿔,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 남부대회를 소집하였다. 대회가 시작되자 변홍규·이규갑·전효배·구성서·권성집·김광우·윤성범·라사행·이봉구 목사 등 수십 명의 감리교회 목사가 감리교회의 재건을 선언하고 퇴장하여 대회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그 후 11월 27∼30일 정동제일교회에서 남부대회가 열렸으나 교파간의 갈등과 친일 부분에 대한 입장 차이로 8개월간 유지되고 남부대회는 해체되었다. 새문안교회에서 퇴장한 목사들을 중심으로 감리교회 재건을 위하여 냉천동 31번지에 기독교조선감리회 유지위원회를 조직하고 이규갑 목사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김광우 목사는 피난민 중심의 청파교회에서 반년 안팎의 짧은 목회를 하고 가정사정상 자월도로 내려가 자월교회를 돌보며 인천지방 감리사로 일을 하였다. 재건파에 앞장섰던 그는 당시 분열의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해방이 되어 죽었던 감리교회가 다시 살아나긴 했으나 재건, 복흥이란 상태 아래 성장하면서 서로 물고 뜯고 싸움질만 하느라고 신앙적으로 약화되고, 도덕적으로 타락이 되고, 사상적으로 분파의식만 성장되어 갈수록 교회는 지리멸렬의 위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김광우는 재건파의 실무로, 김희운은 복흥파의 실무로 막후 접촉을 하여 합동을 추진하였고, 마침내 1949년 4월 29일 기독교대한감리회 통합총회가 열려 김유순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교육국 총무에 류형기가 선출되나 류형기의 사퇴와 천거로 김광우는 교육국 총무를 시작으로 전도국, 사회국 총무로 8년간(1949∼1956) 총리원에서 일하였다. 그는 뛰어난 행정가로서 활동하였으며 일제에 의해 여선교사가 쫓겨나며 민씨가에 빼앗긴 배화여자중·고등학교를 감리교회 교회학교로 찾는 데 참여하고 7년여간 배화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 또한 이화여고, 이화여대, 연세대학 등의 이사로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재직하였다.

김광우는 그 후 1년간 국제대학 학장으로 행정일을 하다가 자교교회로 파송을 받아 1963년 3월까지 6년간 시무하였다. 자교교회에서 시무하는 동안 교회 건물을 증축하고 교회 부흥에 힘을 썼으며 1958년부터 서울북지방 감리사직을 수행하였다. 감리사 시절 삼청동교회에 화재가 발생하여 교회와 그 옆집이 전소되었는데 목사 사택의 실화로 발생하여서 옆집의 보상 요구로 어려운 형편에 처하였다. 총리원 전도국에 예산이 없어서 현재의 노인목사를 강릉지방으로 전임시키고 젊은 이재은 목사를 파송하여 교회 복구의 일을 추진하였다. 옆집과 보상비를 합의하고 기독교세계봉사회와 지방 교회에서 복구비를 얻어다가 붉은 벽돌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또한 파주교회와 문산교회 등을 복구하고 신축하였다. 그 시절에 감리교공동묘지를 고양군 금촌면에 창설하고 묘지관리위원장의 책임을 맡았다.

1963년에는 한국 감리교회의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의 담임자로 파송받게 되었다. 1963년 3월 24일 “뜻밖의 부르심을 받고서”라는 주제로 첫 메시지를 전하고 1972년 5월 25일 65세로 자원은퇴하기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62년 총리원에서 정동제일교회에 선교 80주년 예배당을 신축하기로 하였으나 모금문제, 설계문제, 대지 안의 명도문제 등의 어려움이 있어 기공식은 1968년 가졌으나 건축은 진전되지 못한 채 1970년대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선교 80주년 기념사업으로 해외선교사업이 있었는데 정동제일교회와 김광우 목사는 말레이시아 사라왁 지역에 김성욱 목사를 선교사로 파견하였다. 선교비 중 3분의 2는 중부연회에서 나머지는 정동제일교회에서 부담하기로 하였다.

감리교회 내의 정치서클인 성화파, 정동파, 호헌파 중 정동파를 이끄는 리더였던 그는 1967년 중부연회 연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교회와 교단 관계의 업무가 늘어났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목회활동에 전념하기를 원하여, 1968년 연회장직을 사퇴하고 연합기관, 학교, 총리원 이사직 등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교회 예배 참석인원이 계속 줄자 그는 교회 부진의 모든 책임을 지고 자원은퇴하였다.

은퇴 후 이촌동 지역에 한강중앙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다가 동생인 김광덕 목사에게 교회를 위임하고 은퇴하였다. 1979년 1월 29일 미국 이민길에 올라 우드랜드 지역에 한인교회를 개척하였다. 미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다 1990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1984년 쓴 회고록 《나의 목회 반세기》는 일제 말기 및 해방 후 감리교회 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저서:《나의 목회 반세기》, 바울서신사, 1984;《韓國監理敎會百年》, 전망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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