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권원호(權元浩, 1904. 8. 5∼1944. 4. 13)


순교자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신우리에서 권오방(權五方)의 장남으로 태어남.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2월 7일 윤순덕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으며 강원도 고성으로 이주하여 상업에 종사하다가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권사의 직분을 받고 주일에는 가게문을 꼭 닫던 그의 소원은 교역이었다. 1936년 7월 28일 고성읍이 큰 홍수로 거의 전멸할 때에 그는 가옥과 세간을 전부 떠내려보냈다. 그러나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집과 세간은 모두 잃었으나 온 식구가 무사한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리고는 “주님, 저를 살려주셨사오니 어디든지 보내주사 주님의 일을 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교인 중에는 신학교도 다니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교역을 하겠느냐고 비방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못들은 체하고 열심히 기도하였다.

1938년 강원도 통천군 흡곡면 명고리 통천교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1939년 5월 서울 정동교회에서 모였던 제7회 동부·중부·서부 연합연회 때에 원산지방 회양읍교회 전도사로 파송받았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심방하며 전도하여 연약하던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특히 청년들이 많이 나왔다.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자 그는 “이런 때일수록 우리 신도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정신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면서 설교를 통해 교인들을 훈련시켰다. 그는 “예수재림”, “구주탄생”, “무주공산 삼천리” 등의 제목으로 설교하며 일본이 아무리 칼과 권력으로 한국인을 사로잡으려 해도 국가와 민족은 하나님의 섭리에 달린 것이요, 일본의 천황까지도 예수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그가 “신사참배 문제”란 제목으로 신사참배 반대와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설교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하한 물건이라 해도 손으로 만든 것은 우상이다. 신사도 인조물인 이상 우상이다. 더욱이 예수는 세계인류를 지배할 유일신이다. 천조대신은 일본국을 조성한 신이지만, 여호와의 사자로서 일본국을 지배할 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호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신은 우상이다. 우상인 이상 신사에 경배시키는 경찰관은 종교 훼방꾼이다.”

1940년 첫 주일,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가택수색을 하다가 그의 집에서 태극기가 나오자 일본 경찰은 큰 수확을 얻은 듯 그를 체포하였다. 한편 태극기는 권 전도사의 집에서만 발견된 것이 아니었다. 교우들의 집에서도 나오자 일본경찰은 정신 없이 날뛰었지만 아무런 단서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일본경찰은 할 수 없이 권 전도사만을 구속하여 여러 가지 심문을 하고는 최후로 세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였다. 첫째는 외국으로 도망을 가는 것, 둘째는 자살을 하는 것, 셋째는 평생 감옥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너희가 나를 악형하여 가두었으니 도망할 수 없고, 자살은 기독교인이 큰 죄로 아는 것이니 할 수 없고, 셋째의 평생을 감옥에서 지낼 수밖에 없다. 삼천리 강산이 구치소요 이천만 동포가 미결수인데 사회가 감옥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고 하였다. 결국 불경죄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그는 몸이 강대하고 튼튼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과 악형의 여독으로 몸이 점점 쇠약해져서 서대문감옥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하였다.

참고문헌:윤춘병·조명호 편저, 《마라나타》, 보이스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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