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권성집(權成集, 1888∼1966. 12. 22)


목사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남. 일찍이 기독교인이 되었고 1915년 9월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해주에서 홀(Sherwood Hall, 賀樂) 박사가 경영하는 병원에서 원목으로 2년간 시무하였다. 그 후 강화도 교동교회에서 1919년에서 1920년까지 시무하였고, 1921년 9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1920년부터 1922년까지 강화읍교회에서, 1922년부터 1930년까지 부평.영종.신도구역에서,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주문 삼산구역에서,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영흥 대부교회에서, 1934년부터 1937년까지 강화서구역에서, 1938년 강화 흥천교회에서 시무할 때 창립 시 예배당인 초가집을 헐고 교회 설립자인 ‘김용하·전병규 기념예배당’으로 석조건물을 지어 봉헌하였다.

1939년 주문진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40년에 ‘사상범 예비검속령’으로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정춘수의 혁신교단에 반대하여서 실형선고의 이유로 강종근 목사와 함께 파면당하였다. 그는 일제의 교회탄압에 항거하여 옥고를 치르고 1942년 출옥하였다.

일본 경찰이 “하나님이 높으냐, 천황이 높으냐?” 하고 물을 때 권성집 목사는 “묻는 말부터가 틀렸소. 하나님이 높으냐가 무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께 일본 천황을 비교한단 말이오? 정신 빠진 소리 작작하시오” 하며 큰소리를 쳤다는 일화가 있다.

그 후 교역을 잠시 중단하고 은둔 상태로 지내다가 해방이 되자 다시 상경하여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도화동교회에서, 1950년부터 1951년까지 원효교회에서 시무하였다.

해방 후 교회재건을 위하여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연원을 둔 친일 지도자들이 반민족적, 반신앙적 작태를 회개, 반성하지 아니하고 조선기독교회로 이름을 바꿔,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 남부대회를 소집하였다. 대회가 시작되자 변홍규·이규갑·전효배·권성집·구성서·김광우·윤성범·라사행·이봉구 등 수십 명의 감리교회 목사가 감리교회의 재건을 선언하고 퇴장하여 대회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그 후 11월 27∼30일 정동제일교회에서 남부대회가 열렸으나 교파간의 갈등과 친일 부분에 대한 입장 차이로 8개월간 유지되고 남부대회는 해체되었다. 새문안교회에서 퇴장한 목사들을 중심으로 감리교회 재건을 위하여 냉천동 31번지에 기독교조선감리회 유지위원회를 조직하고 이규갑 목사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6·25전쟁 직후에는 강화도로 가서 1951년부터 1952년까지 조천교회에서,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사미교회에서, 1956년부터 1957년까지 영종교회에서, 1957년부터 1958년까지 신양교회에서, 1958년부터 1959년까지 내가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59년 정년은퇴하고 계속하여 내가교회를 돕던 중 1966년 강화읍 신문리 구세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시편 23편을 늘 외우면서 다녔다. 중얼중얼하기를 잘하여 “무얼 그리 중얼거리시냐?”고 물어보면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 하고 읊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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