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구성서(具聖書, 1894. 5. 9∼1969. 10. 18)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궁평리에서 감리교 초기 전도사 구연영(具然映)의 차남으로 태어남. 그의 형은 열사 구정서(禎書)인데 동대문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아버지와 형은 구성서가 13살이 되던 1907년 항일운동을 하다 함께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그는 강직하고 청렴한 아버지의 교훈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서울 공옥학교와 배재학당에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평양의학강습소(평양의전)에 수학하던 중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여준(呂準)의 권고로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에 협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에게서 전수된 애국정신과 독립운동의 피가 흐르던 그는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체포되었다. 모진 악형 끝에 석방된 후 1920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1년에 견습인으로 허입하고, 1923년 6월 24일에 준회원 허입하면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1925년 협성신학교 졸업(제11회)과 동시에 장로목사 안수를 받아 정회원이 된다. 1921년에서 1924년까지 여주군 북내면에 있는 당우리교회에서, 1924년에서 1926년까지는 이천읍 중리에 있는 이천읍교회에서, 1926년에서 1927년까지는 여주군 주내면 창리에 있는 여주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러나 충직하고도 청렴한 목회생활로 그의 몸이 감당하기 어려워서 1927년에서 1930년까지 휴직하고 원주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의 충직했던 목회는 1926년 6월 연회석에서 신홍식 감리사의 보고에서 엿볼 수 있다. “인내적 신앙과 명석한 성질과 조직적 방침은 웨슬리씨의 풍도(風道)를 많이 모범하였읍니다.” 1931년에서 1932년까지는 충주교회 시무로 목회를 재출발하였다.
1931년 6월 연회에서 조선주일학교연합회에 파송을 받아 〈아해생활〉, 〈신생〉 등의 편집에 관여하였다. 그 외에도 그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에서 많은 일을 하였다. 교육의 재료를 제공하고 강습회를 통한 지도자 양성을 하였다. 〈주일학교신보〉(The Sunday School News)는 주일학교 교육에 필요한 재료를 매월 제공했다. 구성서는 좋은 예화를 포함하여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주일공과와 아동예배순서와 아동설교도 제공하였다. 〈주일학교신보〉에 지도자를 위해 “종교교육과 아동예배”란 주제로 연속해서 지상강좌를 연재하기도 하였다. 선교사 홀드크로프트(J.G. Holdcroft)와 함께 만주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하였고 전국 지역을 돌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민족정신을 고무시켜 일본경찰에 수십 차례 구금되었다. 특히 정춘수 감독이 ‘혁신 5조항’을 발표하고 한국 교회를 일본 교회에 병합시키고자 하였을 때, 류형기·송흥국·정일형·전효배 목사 등과 혁신안에 대해 반대하였다. 이들은 정춘수 통리자의 임기가 만료되어 1942년 10월 총회 시 감리교회의 체제를 바꾸어 보려고 시도하였는데 정보가 누출되어 체포된 후 평양경찰서로 압송되었다. 6개월간 취조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어 류형기는 징역 1년에 벌금 1백 원, 정일형은 징역 1년, 구성서·송흥국·전효배는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아 서대문감옥에 갇혔다.
해방 후에는 교회재건을 위하여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연원을 둔 친일 지도자들이 반민족적, 반신앙적 작태를 회개, 반성하지 아니하고 조선기독교회로 이름을 바꿔,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 남부대회를 소집하였다. 대회가 시작되자 변홍규·이규갑·전효배·구성서·권성집·김광우·윤성범·라사행·이봉구 목사 등 수십 명의 감리교 목사 등이 감리교의 재건을 선언하고 퇴장하여 감리교 재건을 위하여 냉천동 31번지에 기독교조선감리회 유지위원회를 조직하고 이규갑 목사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구성서는 이천, 여주, 수원 등지에서 감리사로 활약하였다. 여주에 여광고아원을 설립하였고 서울서는 마포, 서강, 동자동, 장사동 등지에서 노년목회를 하였다. 또한 〈감리교생활〉, 〈기독교세계〉에 “생각나는 어른들”이라는 주제로 우리 교회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소개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최병헌·김종우·전덕기·홍승하·박봉래·한창섭·배형식·이화춘·권신일·임응순·박석훈·김성대·유시국·김재찬·최성모·김창식·오기선 등의 선배들을 특징지어 소개한 공헌이 크다. 순국선열유족회장, 신간회지도위원, 광복회 이사,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을 역임하였다. 1965년 3월에 정년 은퇴하고 1969년 10월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