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곽만영(郭萬榮, 1904. 8. 7∼1992. 11. 2)


전도사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문막상고를 졸업하였고, 1932년 정동교회에서 세례받은 후 한결같이 정동교회를 섬겼다. 그가 정동교회 엡윗청년회의 교육부장을 맡고 있던 1938년, 엡윗청년회는 무산아동들을 위하여 야간학교를 개설하고 운영하였다. 이는 이미 1935년에 이화유치원 건물을 정동교회가 인수하면서 약속한 사항이었다. 즉 선교부는 정동교회 북쪽에 있는 이화보육학교와 유치원으로 사용하던 건물과 대지를 교회에서 사용하도록 넘겨주면서 그 사용 방도를 요청했는데, 이때 그 사용목적 중 하나로 “무산자 교육을 위하여 야학을 하는 장소로 사용할 것”이라 약속했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시작된 이 야간학교는 엡윗청년회 교육부에서 운영했으며, 곽만영이 교장직을 맡았다. 약 70명의 학생들에게 한글과 일어, 산수와 음악, 그리고 성경을 가르쳤고, 이 야학은 1943년에 문을 닫을 때까지 5년간이나 운영되었다.

한편 정동교회가 8·15해방을 맞이하던 그때, 당시 담임자 황치헌 목사는 일제하 자신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반성하여 1945년 성탄절을 지낸 후 교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사임했다. 이에 정동교회는 곽만영, 이명원, 신창균을 교섭위원으로 선정하고 여러 담임자를 물색하던 중, 1946년 6월부터 김인영 목사를 담임자로 모시게 된다. 이후 그는 1950년 2월 장로로 장립되었고, 그 해 3월 지방회에서 정동교회 전도사로 임명되어 김인영 목사를 도와 목회에 종사하게 된다.

1950년 6·25가 터지고 서울을 비롯한 남한 일대가 인민군에 의해 지배된 3개월 동안, 인민군은 점령지역마다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지도자들에 대한 숙청작업을 하는 한편, 물자와 인력을 징발해 갔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기독교민주연맹’을 조직했다. 이를 지도한 것은 북한의 문교상 이만규였고, 조직된 연맹의 위원장은 김창준 목사였다. 이들은 1950년 7월 10일 YMCA 강당에 3백여 명의 목사를 소집해 놓고 그들에게 인민군 환영대회를 열게 했다. 목사들은 내사되고 자술서를 작성하도록 강요되었으며, 교회당들은 인민군의 본부나 의용군 징집장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교회는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주일이면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정동교회였다. 이 당시 상황을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예배를 봤다. 따발총을 둘러메고 눈알이 빨개 번득이는, 내 아들보다도 손자보다도 어린 인민군들의 감시하에 예배를 봤다. 자연히 교인 수도 많지 않았다. 30∼40명 정도 모여서 예배를 봤다. 내가 사회를 봤고, 김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셨다. 할 말을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의 서러운 듯도, 아픈 듯도 한 야릇한 가슴을 헤아려 보시라. 이보다 더 복통할 일이 있다. 강단 양쪽 벽에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걸어놓고서 예배를 봐야만 했다. 일제의 황국신민서사보다도 더한 처사였다.”

9월 28일 서울이 탈환되었다. 그런데 정부와 교회 안에는 전에 없던 새로운 갈등 대립이 일어났다. 이른바 피난 갔던 도강파와 서울에 남아있던 재경파 사이의 반목현상이었다. 도강파는 재경파를 공산당의 협조자로 모는 반면, 재경파는 불가항력적이었던 사실과 무책임한 도망자들을 반박했다. 이는 단순한 시비 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살인의 비극까지 동반했다. 그 하나의 현장을 목격한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9·28수복 후 예배를 드릴 때마다 기쁨과 환희의 눈물을 마냥 흘렸다. 첫 예배를 마치고 감격이 가시기 전에 김인영 목사께서는 나와 어디 좀 함께 가자고 하셨다. 따라나섰다. 향촌동 청년자위대가 있는 곳이었다. 지금 관상대 뒷곁이었다. 흙더미 한 곳을 지적하시면서 ‘이곳을 함께 파십시다.’ 나는 의아했다. ‘내 아들이오. 어제 낮 친구들의 오해로 부역자로 몰려 총살당했소.’ 기가 막혔다. 가슴이 콱 치밀고 코허리가 찡해왔다. 이럴 수가 없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었다.”

1951년 1·4후퇴 후 70일이 지난 3월 15일, 서울이 다시 탈환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던 7월이었다. 부산에 있던 곽만영 전도사는 7월 15일에 정동교회를 찾아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그는 화물차를 타고 노량진에 도착하여 흑석동교회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다음날 서울시내를 향했다. 그러나 통행이 금지되어 있는 때라 헌병들에게 사정을 말하고 특별 입성 허가를 맡아 한강을 건너 들어갔다. 폐허가 된 서울 거리를 지나서 정동교회에 도착했다. 당시의 교회당 상황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쑥과 망대가 내 키를 넘게 자라 있었다. 마구 헤치면서 교회당에 들어갔다. 기가 막혔다.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주님의 섭리를 더욱 헤아리기 힘들었다. 강단이 폭격을 맞아 폭삭 무너져 내려앉고, 파이프 오르간이 망가져 있었다. 파이프가 휘어지고 부서져 파편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교회는 절반이 파괴되고, 목사관도 날아가고 없었다. 처참한 정경이었다.”

7월 18일, 교인 몇 사람과 함께 무너진 교회당의 한 쪽을 치우고 예배 준비를 했다. 11시 예배를 알리기 위해 종탑에 올라가서 힘껏 종을 쳤다. 그리고 11명이 모여 감격스런 첫 예배를 올렸다. 예배 후에 그는 부산에 있는 김인영 목사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편지로 전했다. 폐품이 된 오르간을 고철로 팔아 마련한 돈으로 교회 소속 건물의 일부를 수리하여 담임목사의 거처를 마련했다. 이런 상황 속에 김인영 목사도 1952년 초 단독 상경하여 목회를 시작했다.

이후 그는 잠시 이태원교회에서 목회하기도 했으나 1955년부터는 다시 정동교회 전도사로 파송받아 활동하였고, 1976년 4월 4일 ‘곽만영 전도사 성역 25주년 찬하예배’를 드림으로 은퇴하였다. 1983년 9월 구성된 ‘정동제일교회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의 자문위원으로 수고하기도 했으며, 1992년 별세하였다. 자녀로는 곽노순 목사 등 4남 3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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