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강태희(姜泰熙, 1889. 7. 23∼1958. 8. 5)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남양리에서 태어남.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남양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인천 영화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일찍이 기독교에 입문하여 1920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 3월 졸업하였다(제12회). 목회는 1923년 1월 서울 창천교회를 담임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1923년 6월 연회에서 학습인으로 허입되었고 1927년 6월까지 시무하면서 교세를 크게 성장시켰고 새 예배당도 건축하였다. 1928년 10월에는 서울 중곡구역으로 파송받아 교회를 빠르게 성장시켰으나 1929년 5월 초 교회를 사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드루신학교에서 신학과 종교교육을 전공하였고 1932년에는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교회를 담임하였다.
귀국 후 서울 중앙교회(1933∼1934), 상동교회(1934∼1937)에서 목회하였다. 1937년 4월부터는 장사정교회 담임을 맡으면서 연회부흥사업을 담당하는 부흥목사가 되어 전국을 돌며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일제 말기의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중생의 은혜가 나타났고, 많은 수의 새신자를 얻었다. 1944년에는 서울 종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48년까지 시무하였고 그 후에는 인천 내리교회 목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홍안백발(그의 두발은 순백색이었다)의 인상적인 풍모에다 모닝코트 정장에 흰 장갑까지 끼고 설교하였다고 한다. 영적 각성을 외치는 그의 설교는 〈기독신보〉, 〈신학세계〉 등에 여러 편 남아 있는데 “폭발적인 영력으로 충일했으며, 토해내는 말씀이 불길처럼 회중의 가슴을 꿰뚫어, 듣는 이마다 회개와 자복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고마는 영감 넘치는 불호령”과 같아 역사하는 힘이 강하였다.
해방 후에는 ‘하나의 교회’란 명분을 내건 남부대회를 주동하여 1945년 11월의 ‘조선기독교 남부대회’에서 총무부장, 1946년 1월 개최된 ‘경기교구회’에서는 회장에 선임되었다. 남부대회가 실패하고 각 교파 교회로 환원하면서는 기독교조선감리회 복흥준비회 회장으로 ‘복흥파’를 이끌었다. 1946년 6월 11일의 중부연회에서 연회장으로, 9월 6일의 특별총회에서 감독으로 피선되어 1949년 재건파와 합동하기까지 활동하였다. 조선기독교연합회(NCC) 회장도 역임했다.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하여 영도중앙교회를 세우고 피난살이 나그네의 설움과 고달픔을 서로 달래며 환고향의 꿈을 키우던 중 강 목사는 영도의 객사에서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병든 몸으로 인천에 돌아왔으나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투병생활 8년 만인 1958년 8월 5일 인천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보고서:“부흥사업 서신”, 〈신학세계〉, 1938∼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