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강매(姜邁, 1878~1941. 6. 19)
충남 천안의 청렴한 선비 가문에서 태어났다. 25세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904년에 상경하여 정동교회의 최병헌 목사와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 등과 접촉하는 가운데 기독교 신앙을 갖기로 결단하고 정동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충격을 받은 그는, 우리도 배워야 국권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먼저 서울 양잠학교를 졸업하였고, 계속하여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법과와 고등사범 수법과(修法科)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교육과 민족운동 등에 헌신했다.
그는 1912년 귀국하는 길로 배재학당 교사로 취임하여 청년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교육하는 데 전념하였는데, 그의 교육태도가 매우 진실하여 학생들만이 아니라 동료 교사들에게도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20여 년 간 교무주임, 부교장 등을 역임하며 봉직했다.
한편 그는 정동교회의 충실한 임원으로 봉사했는데, 특히 1914년 11월에 있었던 현순 목사의 부흥회에서 크게 감화를 받아 거듭나는 “믿음의 문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듬해인 1915년에 그는 〈정동교회30년사〉를 집필하여 귀한 자료를 남기게 되었으며, 1918년 5월 28∼30일 최병헌 감리사의 사회로 피어선성경학원에서 열린 경성지방회에서 정동교회 전도사로 임명되어 평신도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1920년대에 이르러 사회주의 사상과 공산주의 운동이 등장해 3·1운동에서 좌절감을 맛본 청년들에게 급속히 확산되어 갔고, 이들이 1925년에 이르러 반기독교운동을 정면으로 들고 나왔다. 이를 계기로 당시 교회 안에서 자성의 소리가 높아졌는데, 이때 정동교회 안에서 혁신의 주역을 담당한 이가 신흥우·조병옥·강매 등 평신도 지도자들이었다. 여기서 당시 〈기독신보〉에 발표한 그의 ‘우상’론을 살펴본다.
“조선은 특히 미국의 교파를 계승한 듯한데, 복음의 진리 즉 영적으로 신생하는 도리를 수수함보다도 그의 조직 또는 제도하에 신음하는 듯이 보인다. 교회를 조직하는 것이 성결, 구속, 회개, 신생하는 도리보다 전제조건이 되는 듯이 보인다. 영적 깨달음이 있은 후에 회개가 있고, 회개가 있은 후에 신생이 있고, 신생이 있은 후에 기쁨이 있고, 기쁨이 있은 후에 비로소 교회가 있을 것이니, …… 교회는 즉 하나님이 아니오, 교회 또한 하나님의 창조물 중의 하나인 까닭이다. 우리가 만일 교회의 조직 또는 제도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몰각한다 하면 이는 분명히 우상숭배일 것이다.”
한편 그는 낮에는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상동청년학원 야간부에서 청년들을 가르쳤다. 상동청년학원은 1904년 10월 상동감리교회 전덕기 목사에 의해 설립된 중등 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 과정에서 큰 명성을 떨친 학교다. 교사로는 전덕기, 주시경, 장도빈, 최남선, 남궁억, 현순, 조성환, 이필주, 이승만, 유일선, 고주연, 박재욱, 장지연, 오의선 등 쟁쟁한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맡았고, 모든 교과목을 통해 지식은 물론 민족혼을 불어넣는 교육을 시켰다. 강매도 이 학교의 설립취지가 마음에 들어 낮에 가르치느라 피곤한 몸이었지만 다시 야간에 나가 강의를 한 것이다.
1914년 상동청년학원이 전덕기 목사의 죽음 이후 운영난으로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되자, 밤 시간을 얻은 그는 글을 써서 그 해 10월부터 월간지 〈공도〉(公道)를 발간하였다. 이 잡지는 4×6배판 70면 안팎의 월간지로서, 내용은 종교·교육·사회개선 등 삼대 강령으로 하고, 정의 공도에 기본하여 인지의 개발과 사회 개선을 목표로 하였다. 당시 일제가 한국인들에게 출판 허가를 내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잡지의 허가가 나온 것을 볼 때, 당시 경성 고등법원장으로 있던 일본인 와다나베(渡邊暢)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와다나베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매호 글을 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창간호에 내무대신 우사미가쓰오(宇佐美勝夫)의 “잡지 공도에 붙이는 말”과 세끼야(關屋貞三郞)의 “미국종교가와 회견”(교육 및 학술계)이라는 글을 싣고 있고, 2호에는 와다나베가 “아버지의 사랑”을 게재하고 있다. 그렇다고 〈공도〉가 친일 잡지는 아니다. 다만 잡지를 내기 위한 방법으로 일본인의 글을 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창간한 〈공도〉지도 1915년 3월 통권 제5호를 발간하고 폐간하였다. 운영난으로 지속할 수 없었던 것 같다.
1919년 1월 그는 다시 〈선민〉(選民)이라는 월간지를 창간하였다. 국판 60면 정도의 얄팍한 월간지로서 내용은 주로 기독교 관련 글을 싣고 있었으나, 그것도 단 1호로 종간되고 말았다.
그는 한때 직접 언론계에 뛰어들어 〈중앙일보〉와 〈시대일보〉 등의 편집국장을 역임한 언론인이었는가 하면, 《한문문법제요》(漢文文法提要), 《조선문법제요》(朝鮮文法提要), 《법률요강》(法律要綱), 《잘 뽑은 조선말과 글의 본》(김진호 공저) 등을 저술한 한글 및 한학의 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영어와 에스페란토어에도 만만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시와 수필을 쓰는 문학인이기도 하였으며, 일본에서 정식으로 법학을 전공한 법학도이기도 하였으니, 그야말로 박학한 지식인으로 손꼽히는 존재였다.
1930년대 후반기에 뜻한 바 있어 북간도로 들어간 그는 연길농업실업학교 교장으로 5년간 시무하면서 민족교육에 종사하다가, 1941년 별세하였다.
- 저서:〈정동교회30년사〉, 1915.
- 논문:“조선교회의 재개 자유문제에 취하야”, 〈신학세계〉, 1916. 8(3호);“종교는 하이뇨”, 〈기독신보〉, 1917. 6. 20∼9. 5;“종교와 사회적 생활의 관계”, 〈청년〉, 1921. 3(제1권 1호);“여자문제의 근본적 해결”, 〈청년〉, 1921. 6(제1권 4호);“우리는 불로 지져야”, 〈신학세계〉, 1921. 11(제6권 6호);“세계사조와 기독교”, 〈기독신보〉, 1923. 1. 3;“인류애의 실현과 에스페란토주의”, 〈기독신보〉, 1924. 1. 2, 1. 9;“우상”, 〈기독신보〉, 1925. 12. 30;“남녀교제에 대하야” 〈청년〉, 1927. 6(제7권 5호);“에렌케이 여사의 종교교육관”, 〈청년〉, 1928. 3(제8권 2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