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감리교회 감독. 1820년 2월 22일 오하이오주의 클레르몽 카운티의 윌리암즈버그에서 Israel과 Polly(Kain) Foster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 가족이 켄터키주로 이사하여 오거스터대학을 다녔다. 타고난 소년 설교가인 그에게 친구들이 대학 2학년 때에 학교를 그만두고 순회 선교단에 들라고 충고를 하였다. 1837년 9월 그는 오하이오연회에 입회하여 서부 버지니아 구역 찰스턴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한 후 1839년 집사목사와 1841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840년 7월 신시내티 출신의 Sarah A. Miley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1871년 사망하였다. 오하이오주에서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동안 설교가로서 부러움에 찬 평판을 받았다. 1848-1850년 동안 신시내티의 웨슬리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을때 이름난 장로회 목사이자 논쟁가인 N. L. Rice의 공격으로부터 아르메니아 감리회의 교리를 능란하게 방하하여 유명해졌다. 포스터의 방어변론은 1844년 “칼비니즘 반대론”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1850년 뉴욕 멀베리 스트리트교회로 자리를 옮겨 1857-1860년 노스웨스턴 대학장을 지내고 1868년 드류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1870-1872년에는 학장을 지냈다. 1872년 감독으로 피선되어 유럽, 아시아 및 남아메리카의 여러 국가 교회를 순방하며 교회를 잘 치리했다. 그는 1893년 8월 31일부터 9월 9일까지 한국에 들어와 상동교회에서 열린 제9회 선교회를 주관하였는데 당시 그는 스크랜턴 박사를 한국 교회 감리사로 임명하였고, 전도사 4년 과정, 권사 2년 과정, 속장 1년 과정 등 교직자의 훈련 과정을 제도화시켰다. 또한 정동구역회에서는 노병일 한용경을 권사로 갱신하였으며 유치겸 김창식을 신천권사로 임명하였고, 인천구역회에서는 강재형을 권사로 갱신하였고 최병헌, 정인덕을 신천권사로 임명했다. 포스터 감독은 1903년 5월 1일 뉴턴센터에서 별세하였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