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외국인선교사 DB 캔들러(Candler, Warren Akin, 1857-1941)
1895년 1월 윤치호는 한국으로 귀국하였고, 1896년 남감리교회 리드 선교사가 한국 선교사로 들어와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주던 캔들러 총장이 감독이 되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윤치호의 마음에도 학교를 세울 생각이 부쩍 떠올랐다. 사실 미국 선교부보다 자신이 먼저 귀국했으나 그 동안 서재필과 함께 국가의 일과 독립협회, 독립신문 발간 등 민중개화운동에 주력하게 되어 학교설립을 미루어 오던 차였다. 그러나 국가의 운명이 일본인의 마수에 빠져 더 이상 어쩔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후에는 개성에 들어앉아 인재를 양성하자는 생각이 떠오르고 있을 때 마침 존경하는 스승 캔들러 총장이 감독의 자격으로 온다니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학교설립을 주선했다. 물론 윤치호 개인으로도 학교 하나쯤은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남감리교회의 학교라야 미선교부로부터 인적 물적으로 후원을 받기가 손쉬웠던 것이다. 1898년 남감리교회에서 감독이 된 캔들러 박사가 1906년 9월 내한하여 조선남감리교회 제10회 선교회를 주재하면서 개성에 윤치호가 원하던 선교학교를 세우기로 결의한 후 그해 10월 3일 학생 14명을 비롯하여 개성 유지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개교예배를 드렸다. 학교 이름은 한영서원이라 했다. 한영서원의 설립기금은 윤치호가 캔들러 학장에게 기탁했던 200달러를 비롯하여 윤치호 선친이 기부한 정동 토지대금 1,000원과 윤치호 부자가 별도로 마련한 1,000원 등 3,000원으로 개교했다. 당시 캔들러 감독은 윤치호의 선친 윤웅렬 장군을 방문하여 학교가 발전하도록 후원하여 줄 것을 부탁한 바도 있다. 한영서원은 미국 남감리교의 후원을 얻어 소학 과정과 중학 과정, 그리고 중학 과정 졸업생이 들어가 공부하는 영어과가 있었다. 영어과의 목적은 당장 국내 중등학교의 영어교사를 양성하자는 것이었고, 성적이 좋은 학생은 외국 유학을 보내 국가와 사회 차원의 일꾼을 양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차 한영서원에 대학부를 설치할 목적에서 그 예과격으로 두었던 것이다. 학교 설립 수년 만에 개성에는 한영서원 소학부, 중학부, 실업과, 실업과를 위한 실습장, 목장, 염색공장 등을 설치했는데 이것으로 봐도 장차 한영서원은 실업대학을 지향했던 사실을 반영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총독부에서는 105인 사건을 날조하고 윤치호를 신민회 책임자로 꾸며 최고의 징역을 선고하는 등 박해하여 1917년 결국 한영서원은 폐지, 송도고등보통학교로 격하되었다. 캔들러 감독은 한국에 큰 희망을 주고 갔으나 악랄한 왜인은 그 희망을 송두리채 잘라버렸던 것이다. 그 후 캔들러 감독을 1941년 별세했다.